Sagittarius(사수자리)

판의 미로 (스포o)

tied_canis 2018. 12. 9. 23:35

상상은 현실의 거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판의 미로에서 지하세계가 이야기 하는 고통과 거짓이 없는 세상이란, 현실에 존재하는 고통과 거짓을 표현한 것일지 모른다. 영화에서 판타지와 현실이 묘하게 혼재되어있는 모습도 아마 이것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오필리아의 시험에서 등장하는 판타지적인 장면들도 기괴하기 짝이없고 어린이 동화에 나오는 밝고 명랑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현실과의 괴리감이 줄어들었다. 현실에는 요정을 산채로 뜯어먹는 괴물은 없어도, 무고한 아버지와 아들을 비정하게 죽여버리는 괴물같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시키는 것에 복종하기만 하는 것은 당신같은 족속들이나 하는 것이오."

영화가 스페인 내전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영화 외적인 상징성을 인물에 대입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정도 까지는 하고싶지 않다. 다만 저 대사만큼은 기억이 난다. 카르멘의 주치의는 저 말을 끝으로 비달 대위에게 죽음을 맞이하지만, 저 한 문장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에게 가장 강력하게 남아있었다. 동시에 오필리아가 마주하는 시험에서도 저 메시지를 만날 수 있었는데, 마지막 시험에서 오필리아가 판의 요구를 거부하고 동생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을 때 주치의가 오버랩 되는 것을 느꼈다. 

현실에서 보면 오필리아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을 맞는다. 새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죽고, 남은 것은 갓 태어난 동생하나뿐. 그러나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 사건이 결국은 그토록 원하던 지하세계로 돌아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지하세계는 아무래도 사후세계라는 느낌이 들 만한 단어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쨌든 현실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지 모른다. 영혼이 결국 지하세계로 돌아갔으니 그 일련의 사건들이 상상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라면, 오필리아 본인에게 있어서는 해피엔딩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오필리나는 훗날 다시 지상에서 동생을 데리고 지하세계로가 왕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다시 돌아온 오필리아가 동생에게 지하세계로 갈 것을 제안했을때 동생이 선뜻 따라나선다면, 이미 그에게도 현실은 오필리아에게 그랬던 것 처럼 도망치고 싶은 곳에 지나지 않을테니까. 현실을 피해 도망쳐야만 했던 오필리아보다는 동생이 현실에서 고통과 거짓을 덜 마주하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훗날 그녀의 동생이 살아갈 현실은,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조금은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